화서 이항로의 시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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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1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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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고종 4)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3월 18일 벽계 향리에서 별세하였다.
다. 이 때 1개월 여 강화섬을 약탈하던 프랑스군을 문인 양헌수가 순무천총으로서 정족산성 (정족산성)에서 격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를 올려 징계하고 삼가야 할 요점을 아뢰고 이어 만동묘의 복원을 청한 뒤 사직, 고향 양평 벽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존화양이라는 춘추대의에 입각한 척사 theory(이론)이 실제로 잘 시행되지 않음을 보고,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자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공조참판에 승진하여 政府(정부)당상에 임명되고 부총관을 겸하게 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무엇보다 당시 당면한 특수성에 비추어 직언자…(d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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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철종 13) 이하전의 옥사가 일어나 김순성의 무고로 하옥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고, 1864년(고종 1) 1월 장원서별제가 되었다. 이때 임금이 그 주장을 채택하여 중외(중외)에 포고하고 전수를 정론(정논)으로 삼았다. 또 시무론(시무논)에 있어서는, 전제(전제)개혁은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전(공전)의 제도를 채택할 것과 기민(기민)구휼을 위한 사창(사창), 풍속교화를 위한 향약, 병농의 일원화를 위한 부병제의 시행 등을 주장하였다.
설명
화서 이항로의 시대인식에 대한 글입니다. 또 소학(소학)과 주자가례를 근본으로 삼고, 4서(사서)를 주(주)로 삼았으며 경서의 주석을 비롯하여 주자대전(주자대전), 주자어류(주자어류), 송자대전(송자대전) 등을 애독하면서 제자들에게도 이를 권장하였다.
그는 조선말기에 가장 저명하고 influence(영향)력 있는 성리학자로서 학설은 주리론(주리논)으로서 우주론(자주논)에 있어서는 이원론(이원논)을 주장하였다. 이어 전라도도사·지평·장령 등을 역임한 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동부승지가 되어 위정척사에 입각한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이때 병의 증상을 말하면서 경복궁(경복궁) 중건(중건)의 중지와 부역과 취렴의 시정을 촉구하고 상벌의 마땅하지 못한 것과 서양文化의 유통을 근절해야 한다고 거듭 건의했으나 임금은 의례적인 비답만을 내릴 뿐이었다.